도산 안창호의 4대 정신
1. 무실
실은 진실, 성실의 '실'이요. 실질, 실력의 '실'이다. '실'은 참이며 알맹이 이다.
거짓이 없는 것이 '실'이다. 무(務)는 힘쓴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무실' 이란, '참되기를 힘쓰자', '진실을 실천하자'는 뜻이다.
2. 역행
힘써 행하라는 것
나 자신부터 몸소 행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는 백가지의 논설보다는 하나의 본보기가 더 힘있고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스스로 실천의 본보기를 보였다. 행하으로써 배우고 배움으로써 행하자는 학생 일치의 사상을 그는 강조하였다.
3. 충의
사람은 어떤 일을 하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언제나 참되고 신용이 있고 충성심이 있어야 하며 옳은 일이면 어떤 것이든지 일단
작정을 하면 내게 이롭건 불리하건 끝까지 성실성을 다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
4. 용감
사람은 무슨 일에나 용기가 있어야 한다.
참과 거짓, 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가르고 참의 편에서 움직이고 살아가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용기가 있는 인간 용감한 국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말에는 애국 계몽 활동을 하였으며, 이후 도덕적 실력양성과 교육에 중점을 두고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9세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으며 12세 때 아버지를 여읜 후로 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1894년 서울로 와 언더우드가 세운 밀러학당(후에 구세학당으로 불림)에 입학하여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으며 서구문물을 습득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질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바로보고 철저한 자기 비판 의식을 통해 우리 민족도
실력양성, 즉 '힘'을 길러야 함을 다시한번 깨달았다.
1896년 구세학당 졸업 후 조교로 복무, 고향으로 돌아와 이석관의 장녀 이혜련과 약혼
1897년 독립협회 가입
독립협회 활동을 통해 근대화론과 민주주의사상을 접하고, 그 영향 아래 자신의 정치 및 사회사상을 키워나감
1899년 강서구 동진면 암화리에 점진학교 설립. 최초로 설립된 근대학교로써 안창호는 교육구국운동에 뛰어들게 됨
1902년 약혼녀 이혜련과 결혼 일본을 거쳐 미국에 도착 가정고용인으로 청소하는 일 등 노사에 종사하며 미국 소학교 통학
3년간 점진학교에서 교육사업을 시행한 뒤, 본격적으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고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유학 결심
미국으로 가는 뱃길에서 일몰 중에 망망대해에 우뚝 속은 하와이 섬의 웅장한 모습을 보고 감격하여 '도산' 호를 지음
1903년 재미교포와의 단결과 계몽을 위해 한인친목회 조직, 회장에 피선됨
190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리버사이드로 이주. 기독교 경영의 신학 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 수업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를 창립, 초대회장이 됨, 순국문판 공립신보 발행
1907년 동경을 거쳐 환국, 평양에 대성학교 설립, 평양, 서울, 대구에 태극서관을 두고, 평양 마산동 자기회사 설립
1908년 서북학회 창립. 교욱에 몰두하는 한편 각지를 순행하며 신민회 사업을 의논함
1909년 청년학우회 창설. 육당 최남선이 중앙총무로 도산을 도와 실무 담당.
안중근의사 의거로 서울 용산 헌병대에 수감되었다가 두달만에 석방
1910년 국외 망명
1911년 북만 밀산현에 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이 여의치 못해 러시아, 독일, 영국 등을 거쳐 미국 뉴욕항 도착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해외 지방총회를 망라한 대한인국인회 중앙총회 조직, 초대회장에 선임
민족운동의 핵심체로써 민족성부흥운동을 위한 청년 엘리트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 흥사단 조직에 착수
"공립신보" 를 "신한민보"로 개제
1913년 청년학우회 후신으로 흥사단 설립. 발기인은 전국 8도를 대표하는 25인의 동지로 함
1914년 대한인국민회가 캘리포니아 주지사로부터 정식 사단법인 인가를 받음
1917년 송종익, 임준기 등과 함께 북미 실업주식 회사 설립. 주로 멕시코 교민사회 방문하여 대한인국민회 조직 운동 강화
1919년 상해 임시정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 취임 연동제, 동립운동 방략 제창.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 발간. 내각 개편으로 국무위원 노동국총판이 됨
1920년 독립운동 중심 세력의 통합에 주력하는 한편 흥사단 원동 위원부 설치.
1921년 임시정보 세력 통일에 노력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인책사임. 상해에서 국민대표회 발기
1922년 서울에 수양동맹회. 평양에 동우구락부 발족을 지시. 국민회 분쟁 격화, 하와이 지방 총회 해체하고 하와이 한인
교민단 조직
1923년 상해에서 국민 대표회 개최, 동 부회장이 됨.
동회가 개화파와 창조파로 대립되어 결렬되자 대독립당 결성과 독립 운동 근거지 이상촌 건설 계획 수립
1924년 북중국 만주 방면을 시찰하여 이상촌 후보지 탐사. 남경에 동명학원 설립
1926년 미주에서 다시 중국 건너가 가을부터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 사업 추진
1927년 길림에서 군사 행동 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토의
1928년 이동녕, 이시형, 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에서의 이상통 계획을 단념하고 남경서 토지 매수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폭탄 사건으로 피체되어 인도됨. 인천에 호송되어서울로 압송. 4년 실형받고 서대문,
대전 감옥에서 복역
1935년 대전감옥에서 2년 반만에 가출옥. 지방 순회후 평남 대보산 송태 산장에 의거
1938년 경성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서거
주요 교육활동
을사 5조약을 통해서 대한제국의 실권을 악하게 된 일본은 본격적인 민족교육말살 정책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육관제법이 제정되어 각 관 공립학교마다 일본인 교원이 배치되었으며 교육의 내용 또한 자주독립을 고취하는 어떠한 내용도 가르치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사립학교, 야학 등 민족교욱기관은 까다로운 조건을 갖춰야만 설립인가를 받을 수 있었고 그나마 설립된다 하더라도 통감부의 말 한마디면 언제든 폐쇄될 수 있어 민족교육은 점점 설자리를 잃어갔다. 식민지교육은 식민지통치의 핵심적인 부분이므로 일제는 혈안이 되었다. 민족교육을 말살하거나 왜곡시키지 않고서는 식민지를 유지하기 위한 교육 추진이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도산은 독립운동 방략의 핵심으로 교육을 강조하며 평생 동안 여러개의 학교를 설립하였고,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개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격완성', '인격훈련','인격수양'을 강조하며 가는 곳마다 사회교육운동을 추진하였따. 식민지 교육이 식민지제도의 핵심적 부분이라면 이에 대항하는 민족 독립운동 또한 핵심적 요소를 민족교육에 두는 것은 당연하다. 민족독립운동의 핵심적 기초를 교육에서 찾은 도산의 관점은 이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 점진학교(漸進學敎)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교육의움직임은 강화도조약 이후, 독립협회의 활동을 통해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독립협회는 근대화를 통하여 자주독립의 내실을 갖춰야만 비로소 완전한 독립국으로 될 수 있다고 천명하고 근대 교육체계의 확립을 통하여 국민을 개화시키며 근대화를 계속 추진할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근대 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의 역량을 양성함으로써 쓰러져가는 나라의 자주독립을 지키자는 교육운동은 독립협회와 그 뒤를 잠시 이은 만민공동회의 노력으로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고, 그와 아울러 시대적 상황에 의하여 각성한 지도자들과 개화된 점진학교를 세운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였다.
이곳은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최초의 학교임과 동시에 최초의 남녀공학이기도 했다. '점진'이라는 학교명에는 기회를 기다리며 독립을 준비하는 힘을 기르자는 도산의 뜻이 담겨 있었다. 도산은 점진학교의 교장으로서 오전에는 아이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으며 오후에는 하천을 메우고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드는 황무지 개간 사업에도 종사하였다.
2. 대성학교(大成學敎) 와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1905년 11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강제로 '을사5조약'을 늑결하고 식민지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공부를 목적으로 미국에 갔다가 '공립협회(共立協會)' 등의 교민지도활도을 벌이고 있던 도산도 이러한 국내상황에 발맞추어 국권회복운동을 지도해 나갈 조직을 만들고자 귀국하고 이갑 등과 함께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에 평양에 세워진 '대성학교'는 이러한 신민회 활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중등교육기관이다. 대성학교는 신민회의 중심체로서 도산의 교육이념을 구현하는 동시에 정치, 군사, 과학등에 중점을 두고 민족 운동 투사를 양성하는 본거지였다. 특히 도산은 이곳에서 '성실'을 근본으로 하는 인격 도야에 중점을 두고 민족운동의 기본 이념을 주입하고자 분투하였다. 학교 운영뿐만 아니라 출판 사업을 통해서도 도산의 교육 운동은 이루어졌다. 도산은 서울, 평양,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이라는 출판사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높이는 책을 출판해서 판매하였다.
또한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 라는 청년 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청년학우회는 바른 정신을 기르기 위한 수양 단체로서 무실, 역행, 자강, 충실, 근면, 정제, 용감을 기본 정신으로 하여 한가지 전문기술이나 기예를 반드시 학습하여 직업인으로서 자격을 구비하며, 매일 덕, 체, 지 3육의 수양을 한 가지씩 행하여 수련함으로써 민족 계몽 운동과 구국 운동을 이끌어 나갈 지도자를 키우고자 하였다.
3. 흥사단
신민회와 청년학우회의 정신은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의 창립으로 계승된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또다시 망명길에 오른 도산은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이끄는 한편 수양단체인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본단의 목적은 무식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고, 덕, 체, 지의 3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작성하고 신성한 단결을 조성하여 우리 민족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에 있음' 이라는 것이 창립 당시의 약법에 표시된 목적 조문이다. 즉, 흥사단은 단원들과 몸과 마음을 단련하여 품성, 지혜, 도덕심을 닦는다는 수양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인데, 그 수양은 민족과 국가를 외면한 개인차원의 수양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민족독립과 국가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심신훈련단체인 것이다.
흥사단이 설정하고 있는 '수양' 이라는 뜻은 단순히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민족의 발전을 전망하는 대의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도산의 교육 이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며, 도산이 '우리 민족이 완전히 부흥하여 생존번영을 누리고, 나아가서 전체 인류사회의 공존공영에 공헌을 짓는 대사명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흥사단의 주의, 주장이다' 라고 할 정도로 흥사단을 중시한 까닭이다. 흥사단 단원들은 교양과 계몽에 필요한 강연을 듣고 하루에 한 쪽 이상의 독서와 3분 이상의 운동을 수련 과제로 정하고 실천하며 자기 수양에 힘썻다. 또한 함께 저축하여 경제력을 키우기도 하였다.
흥사단은 도산의 필생에 걸친 사업이었다.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에 있을 때에도 그는 중국 본토와 만주, 소련의 연해주 등을 포함하는 원동지역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세웠다. 이 곳에서 많은 청년들이 단원으로 활동 하였다. 도산은 중국 남경에서 일제치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차단된 청년들을 위해 동명학원(1924)를 설립, 운영하였다. 도산의 뛰어난 조직력으로 여러 지역에 단원들을 확보하고 발전을 거듭한 흥사단은 1948년 광복 이후 본부를 서울로 이전하여 지금까지도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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